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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해 달라 그가 부탁한 적이 있었다. 아주 먼 사이가 된다면 편지해달라고. 오래전 일이다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을 때의 일이다
  열 시간이 걸린다는 버스를 타고
  스무 시간 넘게 걸려 도착했던 도시에서의 일이다

  편지를 부탁하며 내 얼굴을 살피는 그로부터 다시
  네가 된다면,

  “안녕, 어젠 해변의 네 살배기들과 조개를 모았어.”
  편지는 이렇게 시작될지도 모른다

  “안녕, 혹시 고사리 장마라는 말, 아니?”
  이런 첫 마디를 눅눅한 편지지에 눌러쓸지도 모른다

  “안녕, 너의 강아지는 건강하니?”
  이렇게 물을 순 없다. 그의 강아지는 이제 스무 살도 넘었을 테고

  “안녕, 파란 눈과 미소를 잊지 않겠다고 내게 했던 말, 아직 기억하니?”
  이런 말이 첫마디로 불쑥 나온다면, 더 먼 미래로 편지를 미뤄둬야겠지


  POST CARD

  안녕, 어젠 해변의 네 살배기들과 조개를 모았어. 석양이 들면 그때 우리가 다 줍지 못한 조개껍질들이 은화처럼 반짝였어. 어젯밤엔 귀와 입으로 고운 모래가 쏟아져 들어와 잠에서 깼어. 불을 켜보니 몸 위에 온통 개미들인 거야. 침대 위에서 과자를 먹다 잠든 탓인가 봐. 오늘은 문가에 초콜릿 조각을 듬성듬성 놓아두었어. 이제 이 방의 벌레들은 초콜릿에 몰두하겠지


  POST CARD

  안녕, 고사리 장마라는 말, 아니? 이곳에선 봄장마를 고사리 장마라고 한대. 난로 앞에 앉아 산책길에 묻어온 그늘들을 말리고 있어. 구름이 세상을 기어 건너는 계절이야. 지나가지 않은 과거의 기억들을 사라지게 할 수 있겠냐고 내게 물었었지. 그렇게 묻는 너의 표정을 떠올리면, 눅눅한 보라색 벽지 속으로 어제 보았던 별과 해변이 동시에 스며들어. 나의 흐린 대답들은 오래전 이곳에 마침표를 똑똑 찍으며 사라졌어. 비 오는 바다 위로 비가 내려. 고사리들이 사람 키만큼 자라나 사람의 이야기를 숙덕일 것 같은 밤이야. 미안, 오늘 시작되는 말로만 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POST CARD

  안녕, 너의 강아지는 건강하니? 너의 강아지가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어. 네가 너의 강아지를 포기하는 날도, 네가 간직한 조그마한 영원을 포기할 날도 없었다면 좋겠어. 약속했던 편지 앞에 이제야 앉았어. 아주 먼 사이의 사람들은 어떤 말로 편지를 주고받는지 잘 모르지만, 어쨌든 편지는 아주 멀리 갈 수 있을 테니깐. 언젠가 내게 “죽음만 남겨둔 병신”이라 했지, 장난감은 망가지며 장난감이 된다고. 그렇게 말하니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고, 말을 대신할 꼬리도 없고, 어디로든 나가야 하는 밤이었지. 별이라니, 여긴 장마야. 하얗게 반짝이는 먼지들이 백지 위로 잠겨가는 걸 지켜보고 있어


  POST CARD

  안녕, 파란 눈과 파란 미소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했던 너의 말, 아직 기억하니? 이 순간을 머릿속에 사진으로 찍어두겠다며 몇 번이나 멈춰 뒷걸음하던 너와, 다 아문 흉터 위에 반창고를 붙여주며 다 아물지 못한 얼굴로 이었던 말들, 난 기억해. 내가 아는 너에게만 편지를 써도 되는 걸까. 그네에 앉아 편지를 부탁하는 네게만 편지가 닿을 순 없는 걸까. 네가 말한 아주 먼 사이가 어떤 사이인지 모르겠어. 거울 속의 우리는 한 번도 떨어진 적 없는걸. 내 손에 쥐어진 이 편지가, 네 손에도 쥐어져 있다면 우리는 그만큼 먼 사이가 된 걸까. 내가 아무에게나 이런 말을 늘어놓는 행려병자가시인이 되었거나. 차곡차곡 미뤄둔 시간들이 미래를 향해 엎질러졌거나 한 건 아닐까. “안녕, 너의 희다못해 파란 눈과 미소를 잊지 못할 거야”, 이런 유치한 작별 말에 빚을 낸 하루였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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